이번 산행은 김종직 군수가 고열암에서 일박 후,
청이당을 가는 중, 구롱(아홉개의 고개)을 지나서 친구 유호인에게 같이 개와 닭 그리고 소를 키우며 살자고 했던 넓은 동부터를 찾는 산행이다.
8월 19일 밤 11시에 출발해서 20일 새벽 3시 쯤 함양 방곡리에 도착했다.
함양은 이미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봉리 근처 정자에서 하룻밤을 지냈는데....
아침에 알게되었지만..
바로 그 정자 앞이 212명의 양민이 국군에게 학살 된 논바닥이었다.(그것도 모르고 잠만 잘 잤다.)
정자앞에서 찍은 212명의 양민이 학살된 장소.
오봉리 산장앞에서 출발준비
산속의 초막
뽀때대장
산행내내 비를 맞고 산행했다.
사립재에서 김종직 군수가 지난 구릉과 동부를 찾기위해 지났던 궤적.
[고열암에서 - 청이당까지]
산행 첫 밤을 고열암에서 보낸 선생일행은 산행 둘째 날을 맞아 오늘은 일기가 좋겠다는 고열암 주지승의 말을 듣고 짐꾼을 줄여서 일부를 돌려보내고 구롱(九隴 )즉 아홉 개의 산릉(고개)을 넘어 청이당에서 쉬고 영랑고개를 넘어 천왕봉까지의 산행이 시작된다.
이날의 행로는 어제의 절(寺)로 절(寺)로 이어진 산행과는 달리 아홉 개의 고개를 넘고, 두 곳의 내(川) 즉 동행한 친구 <극기.유호인>에게 소나 말이나 닭을 키우면서 살면 좋겠다고 하면서 물가바위의 이끼를 긁어내고 글씨를 쓰게 한 동부(洞府)에서 만난 한 계곡과, 당집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청이당 계곡을 건너고 청이당에서 영랑재까지 가파른 비탈길을 올라서 혜유령을 지나 중봉.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험로이다.
이번 구간의 관건이 되는 지명탐구는 九隴 과 동부 그리고 청이당. 영랑재 등이다.
구롱은 고개나 언덕을 일컫는 보통명사이기에,
산속 어딘가에 숨어있을 길을 찾아서 아홉 개의 능선을 찾아야 하고,
청이당. 영랑재. 소년대. 헤유령. 마암 등, 이른바 반세기를 넘은 고유명사들의 지명을 찾아서 고증을 해야 한다.
탐구의 효율성을 위해 이 구간의 산길 및 지명탐구는
“고열암에서_청이당까지”. “청이당에서_영랑재까지”. “영랑재에서_천왕봉까지”
세 단원으로 나누어서 탐구가 이루어진다.
●구롱(九隴)과 동부(洞府)
본문에 나타나는 구롱의 개념은 고열암에서 청이당까지 가는 길에 있는 아홉 개의 고개이며 중간에 동부라는 계곡을 낀 분지형태의 널찍한 곳이 있다.
구롱의 산길 찾기는 탐구의 초점을 우선 동부에 맞추어야한다.
앞서 얘기 했듯이 본문에서 동부의 의미는 분지를 이룬 넓은 골짜기를 일컬음이다.
[1]동부(洞府)는 어디인가?
동부에 관한 본문을 인용한다.
[“연하여 셋째, 넷째 언덕을 지나서 한 동부(洞府)를 만났는데, 지경이 넓고 조용하고 깊고 그윽하며, 수목(樹木)들이 태양을 가리고 덩굴풀[薜蘿]들이 덮이고 얽힌 가운데 계곡 물이 돌에 부딪혀 굽이굽이에 소리가 들리었다.
그 동쪽은 산등성이인데 그리 험준하지 않았고, 그 서쪽으로는 지세(地勢)가 점점 내려가는데 여기서 20리를 더 가면 의탄촌(義呑村)에 도달한다. 만일 계견(鷄犬)과 우독(牛犢)을 데리고 들어가서 나무를 깎아내고 밭을 개간하여 기장, 벼, 삼, 콩 등을 심어 가꾸고 산다면 무릉도원(武陵桃源)에도 그리 손색 될 것이 없었다.“]
여러 차례 탐구를 해본 결과에 의하면 김종직이 동행한 벗 유호인에게 “그대와 내가 은둔하여 살고 싶다고 한 곳”, 즉 동부는 지금의 사립재 골짜기가 본문의 내용과 잘 부합되는 곳이기에 이곳을 동부라고 추정을 한다.
골짜기의 형세가 부채살처럼 펼쳐진 어름터골의 동쪽 상부에 위치한 사립재골은
산청의 금서면과 함양의 마천면,산청의 삼장면등, 지리산 동부쪽의 자연부락들을 이어주는 통로역활을 했던 골짜기로서,
옛길의 흔적도 남아있고 경작이 가능할 정도의 널널한 분지를 이루고있다.
지역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사립재골에는 정확한 입산 시기는 알 수 없지만 한국전쟁 직후까지도 대구에서 왔다는 장정 삼형제가 사립재골에서 담배농사를 지어면서 거주했었다고 한다.
당시에 그 들은 담배 건조장까지 갖추고 거의 기업 수준으로 담배 농사를 지었으며, 아직도 그 곳에는 그들의 삶의 흔적인 집터도 남아있고 여기 저기 밭을 일군 흔적이 역력하다.
한편 어름터 외딴집의 주인 임대봉씨의 말에 의하면 지금도 흔적이 남아있는 폐가 터에는 80년대 초까지도 신병이 있는 한 남자가 혼자서 살았다고 한다.
일찍이 김종직선생 일행이 그곳을 지나면서 나무를 깎아내고 벼나 콩 기장 등을 심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였던 곳에 역시 사람이 둥지를 틀었던 것이다.
한편 본문의 기록에 의하면 고열암에서 동부 즉 사립재골에 오기까지 네 개 아니면 다섯 개의 고개를 지났음을 알 수 있다.
과연 고열암에서 사립재골까지 어느 방향으로 진행을 해야 구롱의 첫 빗장을 열어줄 네 다섯 고개를 넘는 것인가?
[2]구롱(九隴)을 찾아서
아침 일찍 고열암에서 출발을 하여 정오쯤에 도착한 추정지 쑥밭재까지의 길을 두고서
본문에서는 구롱 즉 아홉 개의 능선을 넘었다고 한다.
과연 구롱은 어느 부분들인가?
지형도상은 물론 실제 답사를 해 보아도 정확히 구롱을 구분하기는 지극히 애매하다.
하여서 구롱의 상징적인 의미는 산길이 첩첩산중으로 멀고 험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현재의 산길 상황에서 고열암 추정터에서 사립재까지 가는 방법은
절터에서 되돌아 나와서 송대리 선녀굴 방향에서 올라오는 등산로를 따라가다 상내봉 삼거리를 지나서
오봉리에서 올라오는 등산로인 사립재에서 사립재골을 들어서는 길, 오직 그길 뿐이다.
허지만 이 길은 본문에서 언급한 구롱의 출발점으로 보기에는 여러 가지 정황이 맞지를 않아서
선생일행들이 송대골과 사립재골등의 골짝들을 거슬러서 길을 잡았음을 추정을 한다.
그렇다면 사립재골을 가기 위해서는 九隴중 첫 번째 고개를 넘는 빠른 지름길이 어디 숨어있다고 봐야한다.
오직 그 길만이 구롱의 빗장을 열어줄 열쇠이며, 첫 번째 고개의 위치추정도 가능해 진다.
길 찾기에 들어가기 전 우선 지형도에서 송대골을 자세하게 읽어본다.
지형도상으로는 의논대가 있는 문필봉 (솔봉)능선과 벽송사능선사이에 작은 지능 두개가 독바위 능선으로부터 흐르고 있으며 이 두개의 지능들은 송대골 800고지정도에서 자체소멸 되고 만다. 그래서 이 두개의 지능이 소멸되기 직전 즉 송대골 상부 어딘가에 길이 있을 수 있다.
[2-1]첫 번째 고개 길
본문에서는 고열암에서 첫 번째 고개까지의 행로 정황을 다음과 같이 언급을 했다.
[절에서 나와 곧바로 푸른 등라(藤蘿)가 깊이 우거진 숲 속을 가노라니, 저절로 말라 죽은 큰 나무가 좁은 길에 넘어져서 그대로 외나무다리가 되었는데, 그 반쯤 썩은 것은 가지가 아직도 땅을 버티고 있어 마치 행마(行馬)처럼 생겼으므로, 머리를 숙이고 그 밑으로 지나갔다. 그리하여 한 언덕을 지나니,
해공이 말하기를 “이것이 구롱(九隴) 가운데 첫째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고열암에서 남쪽으로 벽송사능선 1200고지 상내봉(부처바위)을 향하여 송대골 상부를 가로지르면
비록 500년이라는 시공을 넘긴 세월이지만 본문의 기록과 흡사한 정황의 길을 만난다.
절터에서 남쪽의 상내봉 방향으로 빠져 나오면 오래된 옛길의 흔적이 있다.
이 길은 얼마 안가서 잡목들의 넝쿨이 다리를 휘감고,
발부리에 채 이는 것은 왼 통 제멋대로 나뒹구는 썩은 나무들과 바윗돌뿐이다.
그러나 투박한 너덜지대 이기는 해도 흔히 우리가 지리산에서 만나는 있었다 말았다하는 묵은 길이 이어진다.
늙은 고목들이 뿌리를 들어낸 채 서 있기도 하고,
간간히 나타나는 부드러운 토사지대는 이곳이 오랜 세월동안 능선이 소멸되면서
너덜지대가 형성되었다고 추정을 함과 동시에
오백년을 넘은 세월에 홍수로 인한 산사태 등 자연재해로 지형이 변할 수도 있음을 증명을 해 주는 정황이기도하다.
처음으로 넘는 고갯길은 고열암 터에서 (**)가량 왔을 때 닿는 지대이다.
실제는 능선을 넘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고도변화가 거의 없는 지능이긴 하지만
능선을 따라 상부로 오르면 오를수록 좌우 골과의 고도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산세를 하고 있다.
이곳을 “중 혜공이 여기가 구롱 가운데 첫 번째입니다.” 라고 한 곳 즉
구롱(아홉고개)중에서 첫 번째 고개로 추정을 한다.
첫 번 채로 추정한 고개를 넘고부터는 지형이 부드러운 육산지대가 되면서
사람살이 흔적으로 보이는 숯 가마터가 있고, 송대리에서 올라오는 옛길을 만난다.
옛길은 상내봉 삼거리로 이어지는 길이며,
두 번째 고개로 길을 잇기 위해서는 이 길을 버리고 직진으로 진행을 한다.
길의 흔적이 분명한 키 작은 산죽 밭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산 비탈길을 쳐 오르면
구롱 중 두 번째 고개로 추정을 할 수 있는 고개 마루에 올라서진다. 지금의 벽송사능선이다.
부처님 형상을 한 상내봉이 우측으로 50여m지점에 위치한 이 고개는
벽송사능선의 능선 상에 닿고 보면 사람들이 왕래한 고갯길임을 확연히 알 수 있다.
[2-2]동부를 찾아서.
벽송사능선에서는 사립재골 즉 동부가 훤하게 눈앞에 펼쳐져 있지만 본문의 기록대로 길을 따르려면
아직도 두세 개 정도의 고개를 더 넘어야한다.
두 번째 능선인 벽송사 능선에서 사립재골 즉 “동부”를 가기 위해서는 상내봉 ( 부처바위) 방향으로 가야한다.
“동부”로 내려가는 길은 부처바위(상내봉)를 애 돌아 급경사로 내려서는 홈 바위 지점 (빨치산비트 표지판부근)에 부근에 생각지도 못했던 옛길이 숨어있었다.
길은 오래전부터 사람 다닌 흔적이 역력하며 고개를 넘는다는 개념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는 산모퉁이를 두개를 넘으면 사립재골에 도착이 된다.
상내봉에서 이곳까지는 약 500여 미터 거리이며 이곳이 동부라고 추정되는 곳이다.
이윽고 선생 일행은 벽송사능선과 그외 잔잔한 두 세개의 능선을 넘어서 동부(사립재골)에 도착을 해서,
경작지의 흔적이 역력한 동부지대의 하부 지점 쯤에서 한 계곡을 만나서 쉬게된다.
이 계곡은 동부능선 독바위부근에서 생성되어서 흘러온 사립재골의 유일한 계곡으로서,나중에 어름터골의 본류와 만나서 합수를 이룬다.
한편 이 계곡의 물길과 함께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서 서쪽으로 400여 미터 내려서면
어름터 외딴집을 지나 동부능선 쑥밭재로 오르는 정상적인 등산로인
네번째 계곡을 막 건넌 지점으로 어름터골의 정상적인 등산로와 사립재골의 분기점이 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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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어떻게 하면 그대와 함께 은둔(隱遁)하기를 약속하고 이곳에 와서 노닐 수 있단 말인가.” 하고,
“그로 하여금 이끼를 긁어내고 바위의 한가운데에 이름을 쓰게 하였다”고 본문에 기록하고 있다.
각자를 새긴 것도 아니고 이끼를 긁어내고 적어둔 글씨의 흔적이 지금껏 남아 있을 리 만무하지만
행려나 해서 집채만 한 바위들을 휘둘러보기도 하면서 이제 또 나머지 세.네 개의 능선을 찾아 나서야한다.
고열암에서 이 곳 “동부”까지는 벽송사능선을 포함해서 크고 작은 네.다섯 개의 능선을 넘었다.
[3]마지막 아홉 번째 능선 구롱을 향하여
본문의 기록 정황을 보면 구롱을 다 넘어서 올라선 지점이 지금의 동부능선 쑥밭재 부근으로 추정이된다.
사립재골 이곳에서는 어떻게 쑥밭재로 이어지는 길을 잡아야 하는가?
선생일행들이 쉬면서 한담을 나누었던 곳으로 추정하는 지점의 지형은 두 갈래길이다.
한 길은 동부를 거쳐 사립재방향으로 가는길이며, 한 길은 동부능선으로 이어지는 길로서 지형도에 표기되어진 길이다. 추정등로는 지형도에 표기된길을 따른다.
이길을 일행들이 지났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확신은
“동부”에서는 처음엔 거의 고도변화를 주지 않은 채 희미하게 나 있는 짐승 길 같은 실길을 따라서 등성이 두개(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를 넘어서니 숯굴터가 있고 사람살이 나부랭이들이 흩어져 있는 상황이 “동부‘와 이 곳 까지 길을 연결해 준 빌미가 되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민초들의 생활사를 알 수는 없지만 길이 있다는 사실과 함께,
숯굴터를 지나면 산속 절묘한 곳에 암자수준으로 보기에는 크다 싶을 정도의 기막힌 폐사지가 있다는 것이다.(표고 944m)
“동부”를 지나서 만난 이 폐사지는 무명암자로 남겨둘 수밖에 없어도
절이 있었기에 길이 있다는 지극히 상식적인증거는 500년 전의 길을 추적하는데 하나의 큰 힘이 되어주었다.
설령 이 폐사지가 유두류록 그 후대에 생겨난 곳이라 할지라도 절 터이든지 집 터이든지 길이 있을 수준에 적합한 지형 이어야한다는 상식은 현대의 취락구조에서도 적용이 되는 법칙이 아닌가.
(무명암 터는 어름터골에 1598년 정유재란 때 까지도 있었던 두류암의 부속암자가 아닌가 짐작이 간다)
폐사지를 벗어나면 바로 길이자 여덟 번째로 추정되는 능선이다.
이 능선은 동부능선 1323봉과 산청 독바위의 중간지대인 1257정도에서 흘러온 지능으로 지형도에도 능선을 따라 길이 나 있다.
이곳에서는 길을 따라 고도를 100여m만 올리다 우측으로 들어서서 거의 고도 변화 없이( **)가면 자연스레 능선에 닿는다.
길은 거의 없는 수준이며 너덜지대 돌들의 색깔, 주위의 수목상태 등을 보아가며 감각으로 이어나가야한다.
아홉 번째 능선 즉 이 능선은 지형도상 동부능선의 (**)지점으로 흔히들 우리가 윗쑥밭재라고 부르는 곳에서 흘러온 지능으로 어름터 마지막계곡인 네 번째 계곡에서 소멸되는 능선이다. 잦은 등산객들의 출입으로 길이 반질반질하다.(이 길은 어름터 등산로에서 마지막계곡을 지나서 동부능선 진입을 위해 곡각지점에 올라서면 5m정도의 지점에 좌측으로 나 있는 윗쑥밭재가는 갈림길로 연결된다)
구롱의 마지막 능선에 올라서면 동부능선은 바로 지척이다.
이윽고 선생일행들은 고열암에서 천왕봉까지의 길에서 두 번째 만나는 계곡 청이당터에 도착을 한다.
여기까지 도착한 정황을 본문에서는 아래와 같이 언급을 했다.
[구롱을 다 지나서는 문득 산등성이를 타고 가는데, 가는 구름이 나직하게 삿갓을 스치고, 초목들은 비를 맞지 않았는데도 축축이 젖어 있으므로, 그제야 비로소 하늘과의 거리가 멀지 않음을 깨달았다. 이로부터 수리(數里)를 다 못 가서 등성이를 돌아 남쪽으로 가면 바로 진주(晉州)의 땅이다. 그런데 안개가 잔뜩 끼어서 먼 데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청이당(淸伊堂)에 이르러 보니 지붕이 판자로 만들어졌다. 우리 네 사람은 각각 청이당 앞의 계석(溪石)을 차지하고 앉아서 잠깐 쉬었다. ]
산등성이를 타고서 이어진 길은 물론 동부능선상을 일컬음이며 “수리를 못가서 등성이를 돌아 남쪽으로....”부분은 새봉으로 해서 새재 방면으로 추정이 된다.
*<구롱을 다 넘고서>
구롱을 탐구함에 있어서 추정한 지점들을 “고개”라는 개념을 정확히 정의를 내리기에는 많이 미흡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고개의 의미를 사전적인 정의에 따르면 언덕을 넘는 것이라 했음을 염두에 두고 추정을 하였다.
산에서의 언덕은 등고선상의 능선부분 의미하는바 산모퉁이 하나를 돌아가는 것도 고개를 넘는다는 개념을 두고 탐구를 하였음을 밝힌다.
<가객님 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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